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이스라엘 관계 (문단 편집) === 손해배상 협정 ===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이스라엘은 동독과 서독과 오스트리아에 비해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1960년대 이후의 모습이고, 1950년대의 동독과 서독과 오스트리아는 힘없는 약소국이었다. 주권을 되찾은 동서독 양국은 군대가 없었고, 미국과 프랑스 및 영국과 소련은 총칼의 힘으로 [[내정간섭]]을 자행했으며, 동독과 서독에서 독일인 노동자는 저임금으로 먹고 사는 처지였으며, 외교정책도 [[남유럽]]과 [[남아메리카]] 및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미래를 개척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는 1945년부터 1955년까지 연합국의 점령지였고]], 이스라엘국의 [[높으신 분들]]은 [[카를 레너|표리부동한 오스트리아 자치정부를 철저하게 푸대접했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에 중립국으로 [[분리독립]]했지만, 연합국들의 집요한 압력에 굴복하면서 [[20세기]] 내내 외세가 파견한 간첩을 1명도 못 잡는 수모를 겪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외교, 군사, 경제의 측면에서 [[리즈시절]]을 맞이했는데, 1948년 5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미국]],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파나마]],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우루과이]], [[남아프리카 연방]],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인민공화국|폴란드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헝가리 제2공화국|헝가리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루마니아 인민공화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프랑스 제4공화국|프랑스]], [[쿠바 공화국(1902~1959)|쿠바]], [[스위스]],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이스라엘국의 주권을 승인했으며, [[https://en.wikipedia.org/wiki/United_Nations_Security_Council_Resolution_69|이스라엘국의 외교사절단은]] 1949년에 [[유엔 총회]]의 [[https://en.wikipedia.org/wiki/United_Nations_General_Assembly_Resolution_273|원년 멤버로 가입했으니]], 외교무대의 겹경사였다. 게다가 [[동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및 [[서유럽]]의 [[프랑스 제4공화국|프랑스]]와 공수동맹을 체결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서둘러 빠르게 양성한 [[이스라엘 방위군]]은 최소한 서독의 절반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가 있는 무력을 갖췄다. 국민경제의 측면에서도 독일어권 나라들보다 꽤 잘 살기는 했다. 1948년 시점에서 [[이스라엘 파운드]]의 실질 가치는 [[https://en.wikipedia.org/wiki/Sterling_area|파운드 블록에 힘입어]] [[이스라엘 파운드|이스라엘 1파운드]]=[[파운드 스털링|영국 1파운드]]=[[미국 달러|미국 10달러]]=[[서독 마르크|서독 100마르크]]=[[동독 마르크|동독 100마르크]]였으니, 동서독 양국과 이스라엘 본토에서 공장 직공의 최초 [[일당]]은 1마르크~10마르크(동독과 서독) VS 1리라~10리라(이스라엘)의 구도를 형성했다. 이스라엘 리라는 '''영국돈과 등가교환이 가능했기 때문에''' 선진국의 외환시장에서 외화([[파운드 스털링]], [[미국 달러]], [[스위스 프랑]])로 교환했고, 이스라엘 국채는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 해외동포 유대인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많이많이 팔렸으며, 미국수출입은행에서 거액의 저리차관을 빌릴 수가 있었다. 당연히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및 북유럽과 서유럽을 겨냥한 이스라엘 법인들의 무역로는 독일어권 나라들을 일부러 피하고, 친이스라엘 우방국들만 지나가는 항로(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터키↔이스라엘)를 마르고 닳도록 잘 써먹었다. 그런데 1950년대의 이스라엘은 농림어업이든 상공광업이든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중진국이었다. 당대에는 오래 전부터 넉넉하게 비축한 이스라엘국의 외화보유고를 밑천으로 삼아 파운드화를 최대한도로 찍어내서 지불했는데, [[http://sonnet.egloos.com/4059172|스털링 잔고를 활용한]] [[통제경제]]의 [[https://blog.naver.com/moonjosh4/222242622821|산물이었기]] [[https://blog.naver.com/moonjosh4/222242616930|때문에]] [[https://en.wikipedia.org/wiki/Anglo-American_loan|오래 버틸 수가 없는]] [[https://en.wikipedia.org/wiki/Austerity_in_Israel|형편이었고]], 이스라엘 재무부와 이스라엘은행(이스라엘국의 [[중앙은행]])은 화폐정책을 변경하면서 이스라엘 리라의 안정화를 도모했는데, 처음에는 통일환율(영국돈과 등가교환)을 유지했지만, 한참 뒤에 복수환율로[* 예를 들어 통일환율 체제에서 1파운드=1파운드=5달러인데, 복수환율 체제에서 수출입 방면은 수입전용 1파운드=1파운드 및 수출전용 1파운드=1달러로 규정하며, 출입국 방면은 입국전용 1파운드=1파운드 및 출국전용 1파운드=1달러로 규정하는 방식] 변경했으며, 영국돈의 실질 가치가 연속으로 하락하는(£1=$10→$5→$2→$1) 현실을 반영하여 평가절하([[파운드 스털링]]과 등가교환→[[미국 달러]]와 등가교환→[[프랑스 프랑]]과 등가교환)를 연속으로 실행했다. 그래서 초창기의 이스라엘은 동독이든 서독이든 오스트리아든 상관없이 독일인들을 푸대접했다. 예를 들어 서독과 이스라엘의 무역과 교류는 1950년대의 전반기까지 전혀 없었는데, 극소수의 서독 국민들과 이스라엘 국민들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터키를 경유하여 서독과 이스라엘을 방문했으니, 1950년대의 전반기에 이스라엘 본토를 최초로 방문한 서독 국민은 [[https://en.wikipedia.org/wiki/Hermann_Maas|헤르만 마스]]가[*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유럽 대륙을 제패한 시절에]] 유대인들을 해외로 피신시켰던 개신교 목사였는데, 나중에 [[https://en.wikipedia.org/wiki/Yad_Vashem|야드 바솀]]에서 '''[[https://en.wikipedia.org/wiki/Righteous_Among_the_Nations|열방의 의인]]'''으로 기념했다. ] 유일했다. 동서독 양국을 방문한 이스라엘 국민들은 동서독 양국에 입국하여 머무르는 해외동포 유대인들을 최대한 빨리 탈출로 시켜 미국과 브라질 및 프랑스와 이스라엘로 보내기 위해서 [[복수국적|친이스라엘 우방국들의 여권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입국한]] [[https://en.wikipedia.org/wiki/Jewish_Agency_for_Israel|이스라엘 유대인 관리청]]의 [[공작원]]들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일꾼들만 방문한게 고작이었다. 이들은 연합군 군정청들과 협력하면서 연합군 군정청들의 [[내정간섭]]을 요청하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동독과 서독을 다스리는 [[자치정부|자치주정부]]와 [[자치경찰제|자치경찰청]]을 찍어눌렀는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에 깊이 관여한 독일인들이 자치주정부와 자치경찰청에서 워낙 많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유대주의]] 공포에 시달리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부득이한 일이었다. 1950년대의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국의 외화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에 이르렀다.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유대인들이 탈출하여 이스라엘국에 귀순했으니, 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기 위해서 복지비의 지출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친이스라엘 우방국들의 해외동포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호소하면서 이스라엘 국채를 대량으로 매각했지만,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가장 빨리 해소하는 최상의 대책은 외국의 무상원조로 조달하는 거액의 외환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국의 중앙정부는 동독과 서독에 [[손해배상]]을 정식으로 요구했는데, 만약에 대비해 동서독 양국을 둘러싼 동맹국들(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과 해외동포 유대인 공동체들을 움직였으니, 반이스라엘을 표방하겠다면 광범위한 [[경제제재]]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손발이 다 묶인 서독 연방정부는 관광이든 무역이든 금융이든 차질이 생겨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마침내 아데나워 연방총리가 [[독일 연방의회|서독 연방의회]]의 석상에서 유대인 학살을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협상의 시작을 뜻했다. 양국을 대표한 밀사들이 [[독일 본]]과 [[프랑스 파리]]를 왕복했다. 서독과 이스라엘의 협상은 [[룩셈부르크]]에서 차관급 회담으로 진행했다. 마침내 1952년 룩셈부르크에서 배상 협정을 체결하여 나치 독일 정권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약속하였다. 서독-이스라엘 배상협정은 서독 연방정부가 자국 화폐(서독 마르크화)를 약 10년간 분할하여 입금하는 방식으로 독일연방은행의 특정 계좌에 예금하고, 이스라엘 정부는 그것을 인출해 독일산 공산품들과 반이스라엘 적대국들의 [[원유]]를 수입하고, 사전에 예약한 이스라엘 기업들에게 매각하면서 자국 화폐(이스라엘 파운드화)를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마르크화 현금을 유대인 대학살 피해자들에게 매우 유리한 특별환율로 계산하여 리라화 연금으로 지급했다.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 피해자들 가운데 동유럽을 벗어나 서유럽에서 재정착한 유대인들과 북아프리카에서 탈출하여 이스라엘국에 귀순한 유대인들이 받아야 마땅한 몫으로 '''플러스알파 배상금'''(마르크화 현금→서독 공산품→파운드화 현금)을 10년에 1회꼴로 지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